Sartre's Existentialism- 자아 정체성의 결핍 A Lack of Self-identity 인문사회 공부방

  무(nothingness)에 대한 분석은 대자(the for-itself)에 대한 현상론적 이해의 열쇠가 된다. 사고적 의식(reflective consciousness)은 전사고적 의식(pre-reflective consciousness)을 타자화하여 무화시키는데, 이는 사고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아 내의 불안정성을 만들어낸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자아 정체성의 결핍을 일종의 과제로 전화시킨다. 다시 말해 자아의 통합은 대자의 과제가 되며, 이 과제란 곧 자아가 자신의 기반을 찾는 과정이 된다.

  이러한 과제의 차원은 일시성(temporality)에 대한 분석으로 연결된다. 대자가 스스로에 대한 동일성을 잃은 상태라는 사실은 대자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적이다. 대자는 그 과거 혹은 미래와 동일하지 않다. 현재의 대자는 더이상 과거의 그것이 아니며 미래에 다가올 그것과도 다르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사고할 때 나는 과거에 놓인 것을 대상으로 삼으며 미래에 대해 상상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자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분열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이 일시적 몽환상태는 대자의 기본적 특성으로 투사된다.

Sartre's Existentialism- '존재와 무'의 존재론(3) 인문사회 공부방

무(nothingness)에 대한 논의는 사르트르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에 따르면 이를 통해서만 존재(being)의 방식이 이해될 수 있다.
우선 하나의 논리학적 명제를 생각해보자.

이 카페에는 코뿔소가 없다

이 명제에서 '없다'는 말은 단순히 명제에 작용하는 논리적 연산자에 불과하며, 세계가 가진 특성을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반면, 내가 피에르와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 시간에 도착에서 그가 그곳에 없다는 걸 확인했다고 해보자.

이 카페에는 피에르가 없다

이 특수한 상황에서 이 표현은 주체와 독립적으로 서술되는 것이 아니며, 의식에 의해 생산된 것이다. 이 경우 '무'는 실제 세계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며, 카페 속을 떠돌며 우리를 덮치는 것이다. 이때 무화의 힘은 의식의 의도(the intentionality of consciousness)에 의존하는 내재적 속성이다.
예를 들어 내가 무언가에 대해 질문을 한다고 했을 때, 나는 부정적인 답변의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사르르트에게 이것은, 주어진 것이 가진 부정적 속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존재와 무 사이에서 요동치는' 것이다.

Sartre's Existentialism- '존재와 무'의 존재론(2) 인문사회 공부방

의식, 그리고 현상의 존재 모두 존재의 현상을 넘어선다는 사실로부터, 사르트르는 두 종류의 존재 방식이 있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1. 즉자( en-soi, in-itself)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충족시킨다. 전적으로 확정적이며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를 통해 즉자가 갖는 의식적 경험에 대한 초월성을 완전히 결정할 수 있다.
2. 대자(pour-soi, for-itself)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존재방식이다.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의' 의식이고, 관계 안에서 정의되므로, 반투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자가 언제나 특정한 의식적 경험을 초월하는 한, 의식적 경험 안에서 그것을 잡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되어있다. 전사고적 의식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그것을 왜곡시키기 마련이므로, 사고 과정을 통해 대자를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원론적 존재관에서 한 가지 자연스러운 의문이 일어날 수 있다. 존재가 이토록 넘어설 수 없는 두 방식으로 나뉘어져있다면, 의식은 세계에 어떤 식으로 간여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존재와 그 구분에 의해 형성되는 총체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사르트르는 차후 대자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 핵심개념을 찾아내게 된다.

삶 속의 죽음, 죽음 속의 삶-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책 이야기

일반적으로 버지니아 울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난해한 의식의 흐름 기법의 창시자(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그리고 페미니즘의 선구자로서의 이미지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을 갖고 그녀의 소설에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몇 편의 장편을 읽으면서 드는 느낌이다.
우선 의식의 흐름 기법에 대해서는, 지금 말하려는 '댈러웨이 부인'의 경우는 그 쓰임이 뚜렷하지만
'등대로'나 '올랜도' 등의 소설은 전통적인 전지적 작가 시점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무조건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해석하는 것도 무리인 것은,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이 갖는 삶에 대한 태도를 보아도 자명하다.

간단하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싶다.
첫째, 생생한 이미지의 묘사.
이 소설은 여러 등장 인물들의 지극히 주관적인 사변들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만큼 인간이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모든 통찰력과 그걸 수행하는 방식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들어오는 것은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상상, 망상, 혹은 비유인데
거기서 창조되는 이미지들이 눈에 보이듯 생생하다.
아니, 아마 그녀는 분명 그것들을 '눈으로 보면서' 썼을 것이다.
찰랑거리는 이미지들이 스스로 운동하면서 또 다른 이미지들을 창조해내는 것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그대로 말로 옮겨넣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글을 보고 있으면
무심히 보아도 반짝이는 부분, 생동감 넘치게 흔들리는 부분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둘째, 굳이 어렵게 표현하자면, 감성과 오성의 혼재.
칸트에 의하면 대상을 인지하는 감성과 감성의 정리물을 바탕으로 창조적 사유를 수행하는 오성은
독립적으로 이성적 과정을 처리해간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적이고 분석적인 견해일 뿐이고,
실제로 우리가 사유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는 관찰과 사유가 뒤섞인다.
그것들은 수직적 구조가 아니라 수평적 구조를 이룬다.
그렇기에 그녀는 관찰을 단순한 관찰에 머물게 하지 않고,
관찰 자체로 대상 혹은 자연에 대한 창조가 되게끔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대상은 자연스럽게 창조된 법칙으로 이어져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어떤 철학보다 인식과 사유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묘사 방식으로서,
의식의 흐름 기법이 작품 전체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다.

셋째, 삶과 죽음의 대비.
셉티머스와 댈러웨이 부인, 죽은 자와 산 자, 남자와 여자, 운동과 정지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낀다.
삶의 고통을 온 몸으로 느낀 셉티머스는 그 때문에 정신 질환으로 괴로워하다 자살을 택하고,
삶의 정적인 힘, 외적 표피를 생리적으로 따르는 댈러웨이는 느린 노화의 세례를 묵묵히 받아 내며 살아남는다.
그녀가 셉티머스의 죽음을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과 다를 바 없게 여길 때,
버지니아 울프는 삶 속에서 가능한 무한한 죽음들, 삶의 포기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면, 젊은 베르테르의 죽음과는 또다른 방식의 주술적인 액막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괴테는, 베르테르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죽음에 대한 욕구를 액막음 하고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는 그렇게 계속 죽어가는 자신을 느끼고 바라본다.
죽음을 관찰하는 댈러웨이 부인을 또다시 관찰하는 버지니아 울프가 있다.
그것은 삶 속에 산재한 죽음의 요소에 대한 전율이자, 미련이다.
갖다 붙이자면,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 그녀의 선택을 예견케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죽음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댈러웨이 부인을 죽일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소품이라는 느낌이긴 하지만,
완성도와 깊이 면에서 고금을 통틀어 비견할 작품이 많지 않은, 훌륭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조이스의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내적 독백보다 훨씬
삶의 진실을 잘 드러내는 문체와 통찰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뱀파이어의 시간- 재연再演 소설: 뱀파이어의 시간

  그 가르침은 계시처럼 저주처럼 날 옭아맸지. “두 사람에게 내재된, 두 개의 우주보다 복잡한 시간의 갈래. 그리고 두 우주를 단 하나로 모으는 힘으로서의, 사랑.” 내가 널 사랑하게 되고, 너의 시간이 멈추자, 나의 시간도 따라 멈춰 깊은 웅덩이로 고였거든.

  세상의 시간이 한 세기를 훌쩍 넘기는 동안, 난 너와 함께 달리던 자전거를 옆에 끼고 흐르지 않는 시간을 살지. 원형의 공원, 검은머리 소녀가 나타나 낯익은 웃음 지으며 자전거에 멋대로 올라타지. 아버지가 사 주신, 최신형이었던 로버 자전거. 소녀와 자전거를 쫓다 지친 내 눈가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젖어들고, 소녀는 다가와 닦아주지. “울지 마, 너 아직 꼬맹이구나.” 말과 손길이 너의 기억을 부르지.

새 자전거를 끌고 당당히 골목길을 나섰지만, 타는 법도 몰라 친구들에게 놀림 받던 그 날. 넌, 꼬맹아 울지 마라, 라며 건방지게 날 달랬지. 그리고 네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않겠냐고 쑥스럽게 제안했어. 선머슴 같던 네 모습이 그날 왜 그리 예뻐 보였는지.

  길게 늘어선 너도밤나무 행렬 멀리 보이는 주홍빛 개양귀비 언덕, 너와 난 두 개의 자전거로 내달렸고, 지쳐 냇가에 함께 누웠지. 넌 갈색머리칼 늘어뜨리며, 마가렛 르롱같이 멋진 여성 자전거 여행가가 되고 싶다고 했지. 난 시슬레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어. 서로 다른 꿈이 언젠가 부를 헤어짐이 두려워 뒤척이던 난, 날 선 풀에 팔을 베었지. 넌 긴 핏자국을 입으로 한참 핥아주곤, 말했어. “맛있다.”

  어두운 밤이 피운 청회색 꽃 한 송이 내 가슴에 무겁게 뿌리내리고, 그 위로 다시 아침의 해가 뜨고, 그 위로 변비 걸린 구름 드리우지. 소녀가 다가와 내 자전거의 고풍스러운 멋에 감탄하곤, 한 번 더 타볼 수 있느냐 묻지. 공원을 크게 도는 소녀는 내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며 자신의 시간을 밀어가고, 나는 그 모습 잘게 썰어 겹친 둔탁한 기억의 묶음 하나 얻지. 묶음의 꼬리에선 익숙한 개양귀비 향이 흘러 날 취하게 하지. 흐린 구름이 녹아 땅을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자전거는 내려앉는 하늘에 깔려 사라질 것 같아. 그 날의 너처럼.

  예쁜 치마를 입고 관에 누운 너의 입술은, 너무 붉었어. 장례미사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별로 슬퍼 보이지 않았지. 신부님은 포도주 잔을 높이 들며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마시라 명했고,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다고 건조하게 고백했지. 누군가, 네 자전거가 위험한 구식 하이 휠이 아니었다면 넌 차에 치이지 않았을 거라 주장했지. 널 보내고 집에 오는 길은 너무 길어, 난 도착하자마자 쓰러져버렸어. 향기 없는 개양귀비의 독한 향 흐르고, 함께 가자는 네 목소리 따라 널 쫓지만 검정색 갈색 개양귀비만 한없이 헤치는데, 불어나가는 바람에 검은머리 휘날리는 네가 자전거 타고 달려오고 있었어. 우리는 껴안고, 붉은 네 입술엔 내 피가 고여 있음을 알고, 난 네게 더 많은 피를 주었지. 넌 죽지 않았다지.사랑하는 이의 피를 마신 사람은 그와 같은 마음으로 같은 시간 살게 된다고. 내가 살아있으니 너도 살아있는 거라고. 난, 눈을 뜨고, 눈물 흘리며 중얼거렸지.“그렇다면, 네가 죽었으니, 나도 죽은 거야.”

  깨진 시간 속의 난 너도밤나무가 족쇄처럼 자란 숲에 갇혀, 개양귀비 잎이 뱀처럼 피를 탐하게 내버려두지. 하지만 시간 속으로 사라지려는 늙은 어머니의 눈물이 내게 작은 자유를 주고, 난 시간의 흐름을 직각으로 거스르는 침묵의 여행을 떠나지.

  여행 귀퉁이에서, 소녀가 안전한 신형 자전거를 끌고 다가와 말해. 공원 밖을 신나게 달려보자고. 하지만 난 공원을 떠날 수 없지. 기다릴 사람 없는 기다림 때문에. 마음 상해 사라진 소녀는 다시, 예쁘게 단장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지. 공원을 떠날 수 없다면 공원 속을 산책하자 하지. 난 소녀를 자전거에 싣고, 셋은 하나처럼 공원을 행복하게 흘러가지. 소녀는 푸른 연못에 멈춰 내려 연꽃을 구경하지. 난 그 뒷모습 바라보며, 갈증 혹은 허기를 느끼지. 돌아선 소녀는 그런 내게 웃음 짓고, 자전거에 오르려다 넘어지지.무릎에 고인 피 웅덩이. 난, 소녀에게서 달아나지.

  아무리 갈증 나도 마셔선 안되는 게 있지. 웅덩이에 고인 누군가의 시간.

  밤꽃의 뿌리 되어 낮게 쓰러진 나의 공원에 흐느낌이 들려오지. 칠흑 같은 갈색 머리의 아이가 무릎에 붕대 감고 섰지. 붕대를 푼 아이의 몸은 뒤에서 비추는 달빛을 받아 모든 핏줄 선명히 드러내지. 너의 장례식 때, 신부님은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마시라 했고, 사람들은 부활을 믿는다 했지. 아이는 내게, 힘차게 흐르는 피의 길 택하라지. “마시고, 흘러가. 꼬맹아.” 눈 감은 내 입에 젖 같은 피 들어오지만, 난 어떤 길을 마시는지 모르지.

  세상의 해가 내 것처럼 환히 뜰 때, 난 자전거에 오르지. 내 웃음 짓고 있는 소녀를 스쳐 공원 떠나가지. 난 소녀의 몸에서 쏟아져 세상을 흐르는 한 줄기 핏줄처럼, 새로운 시간을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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