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풋한 풀밭 위로 주홍색 개양귀비 넘쳐흐르는 완만한 언덕길, 그 너머로 어렴풋이 드러난 황토색 지붕의 학교 건물, 기울어진 지평선을 비뚜름하게 가린 너도밤나무의 짙푸른 행렬, 촉촉한 하늘에 온통 하얗게 드리운 면사포구름의 성긴 매듭을 간신히 비집고 녹아내리는 뿌연 햇무리, 멀리서 맴도는 연풍의 길 지치며 휘파람새보다도 더 빨리 내게 날아오는, 너.
살짝 말려 올라간 갈색 머릿결이 마주치는 바람결에 얽히며, 너는 굵은 남서풍에 매달린 전동차처럼 하늘까지 미끄러져 오를 것 같았어. 그 뒤로 붉은 꽃이파리 푸른 나뭇잎사귀가 거칠게 끊어지며 맴돌고, 요란하게 체인 감기는 소리와 가볍게 울리는 먼 종소리 틈으로 너의 시원한 웃음이 들렸지.
우리는 마을 어귀를 스치는 시냇가며 산자락을 함께 달리기 시작했지. 너는 너의 낡은 파실 하이 힐 자전거를, 나는 내 로버 세이프티 자전거를 타고. 그러다가 내 운전 솜씨가 더 좋아진 뒤엔 서로의 자전거를 바꿔 타기도 했지.
그렇게 파실과 로버의 시간선이 엇갈리고, 너와 나의 시간선이 엇갈리고, 파실을 탄 너와 로버를 탄 나와 파실을 탄 나와 로버를 탄 네가 마주치며 꼬여 갔지.
내가 너를 뒤쫓으며 소리 지르고, 네가 나를 뒤쫓으며 소리 지르고, 두 개의 자전거에 오른 소녀와 소년이 어느새 하나의 자전거에 오른 한 사람처럼 나란히, 폭신한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리곤 했지.
우린 둘 다 지쳐빠졌지. 자전거를 뉘어둔 채 냇가에 몸 기울여 손 씻고 목 축이고, 함께 풀밭 위에 쓰러져버렸어. 늦봄의 둔한 바람이 구름을 서서히 풀어헤쳤고, 흰 빛은 하늘빛에 스며들어 터키옥처럼 반짝이기 시작했어. 나는 너의 짙은 갈색머리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장난스럽게 너의 손가락을 간질였지. 너는 내 손등을 꾹 쥐었어. 아직 젖살도 채 가시지 않은 두 개의 손이 냇물기를 머금고 서로 단단히 맺혀 있었지. 나는 살짝 곁눈질로 널 훔쳐봤어. 넌, 날 훔쳐보던 눈길을 빠르게 거둬 하늘 높이 던져버렸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고운 볼에 젖은 물방울이 하늘과 땅을 담은 비취로 일렁이고 있었어. 난 말없이 보석 같은 널 바라보았어. 보석의 맑은 단면에 비친 날 바라보았어. 무표정하던 넌 쑥스럽게 입 꼬리를 올렸어.
갑자기 네가 물었어.
"너 마가렛 르롱이란 사람 알아?"
"마가렛 르롱…… 그게 누군데?"
달콤한 침묵에서 미처 깨지 못한 나는, 귀에 선 이름을 무심히 뇌며 되물었어.
"마가렛 르롱이란 여자가, 얼마 전에 미국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자전거로 혼자 여행했대!"
"시카고랑 샌프란시스코가 많이 멀어?"
"그럼! 아마 여기서 중국까지 거리 정도나 될 걸?"
"와, 대단하네. 그 여자도 너처럼 블루머를 입었대?"
"그럼! 블루머를 입고, 가방에는 화장품 상자와 권총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지? 멋지지 않아? 그녀는 여자의 아름다움과 남자의 힘을 동시에 갖춘 완벽한 인간이라구!"
화장품과 권총이라…… 독한 향수에 화약을 섞으면 대체 어떤 지옥 같은 냄새가 날까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이런, 난 지금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조용히 듣고 있었어.
"나도 언젠가 최신형 로버를 사서, 여기서 중국까지 횡단하고 말거야!"
"멋지다. 하지만, 그 정도 거리는 이미 그 여자가 횡단했다며. 넌 더 멀리 가야 하는 거 아냐?"
"듣고 보니 그러네. 음…… 인도? 인도가 중국보다 먼가?"
"음, 아마 그럴 걸."
"그럼 인도까지 횡단하는 게 내 목표다!"
"언제?"
"글쎄…… 한 열일곱 살 때?"
"그럼…… 그때가 되면 이 마을을 떠난단 얘기네?"
갑자기 내 얼굴에 서린 근심을 읽은 네가 웃으며 말했어.
"바보야, 너도 같이 가면 되지."
"내가? 난 너보다 자전거를 못타는데."
"그러니까 더 열심히 연습하면 되잖아."
"하지만 난…… 화가가 되고 싶은걸."
"화가? 르누아르 같은 화가?"
"아니…… 시슬레 같은 화가."
"피. 그게 뭐야."
찌푸려지는 네 얼굴에서 마지막 보석 한 알이 날아갔어.
"그래서, 나랑 같이 가기 싫다구?"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멋진 해결책을 내놨어.
"이렇게 하면 어떨까? 넌 화장품과 권총을, 난 화구를 짊어지고, 함께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거야. 그건 너에겐 완벽한 여성이 되기 위한 모험일 거구, 나에게는 먼 곳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넣는 스케치 여행이 되는 거지. 어때?"
"그림이나 그리면서 쭐레쭐레 다녀서 언제 인도까지 간다는 거야?"
듣고 보니 그렇긴 했어. 하지만 그렇게까지 신경질적으로 말할 건 없잖아. 난 시무룩해져 잠시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어.
갑작스런 바람이 구름을 활짝 열어젖히고, 햇살이 날카롭게 쏟아져 내렸어. 난 눈부심에 몸을 뒤척였지. 길쭉하게 날이 선 풀잎 한 가닥이 팔뚝을 쓰윽 베고 지났어. 난 놀라 벌떡 일어났어.
넌 엄살 피우며 팔 문지르는 내 모습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봤어. 난 살짝 서러워졌어. 넌 달래듯 날 토닥이고, 냇물을 떠다 옅게 엉긴 핏자국을 씻어줬지. 하지만 피는 멎지 않고 계속 조금씩 솟아올랐지. 너는 내 얼굴과 팔을 번갈아 바라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어.
그리고 내 팔을 들어, 상처자리를 핥기 시작했어.
왠지 조금 부끄러웠지만 가만히 있었어. 솔직히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어. 너는 배고픈 강아지 같은 두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쉬지 않고 혀를 놀려 팔을 간질였어. 핏기가 오른 붉은 입술이 함께 부지런히 꼬물거리고 있었지. 사각사각 소리 내며 끈적끈적하게 젖어드는 팔 때문이었는지, 나는 너를 와락 껴안고 싶어졌어.
잠시 후, 자전거에서 막 내렸을 때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로 내 팔을 내려놓는 너의 입가에는, 침이 살짝 묻어 있었지. 난 조금 가빠진 숨을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입에서 나오는 데로 말도 안 되는 걸 물었어.
"내 피 맛이 어때?"
너는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어.
"맛있어."
그게 뭐야, 나는 어이없어 낄낄 웃어버렸어. 하지만 넌 웃지 않았어. 오히려 더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어.
"진짜, 너무 맛있어. 다시 먹고 싶을 정도로."
그러면서 내 손을 꼭 잡았어. 우리는 다시 풀밭에 누워, 실구름이 바람 따라 엉켜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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