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시간- 재림(1) 연재소설: 뱀파이어의 시간

    해는 해의 시간으로 뜨고, 사람들은 사람들의 시간으로 움직이지.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액자를 갖고 있지.
    아니, 사람들은 액자로 존재하지. 얼굴을 담은 액자, 어깨를 담은 액자, 팔다리를 담은 액자, 배를 담은 액자, 생식기를 담은 액자. 액자가 없으면 사람도 없고, 사람이 있으려면 액자를 통해서만 있지. 액자는 사람을 이루는 원소, 혹은 저들의 시간 속에서 저들보다 먼저 난 것인가 봐. 그래서 하나의 사람이란 몇 개의 액자를 엉성하게 이어붙인 난잡한 틀에 투사된 그림인가봐.
    모두가 화폭에 담겨 있기만 해서 누구도 화가가 될 수 없는 세상이야. 그림 속에서 그려보려는 그림은, 그림에 대한 꿈일 뿐이니.
    문득 궁금하지. 왜 저들의 액자는 하나같이 네모지기만 한 걸까? 누구도 액자 모서리를 한 푼 정도 털어내고 싶단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걸까? 너무나 완고하게 네모진 그들의 모습 때문에, 나는 자꾸만 그들 모서리를 놓치고 마는 걸. 그래서 시야를 더 넓혀 억지로 모서리를 담아보면, 이젠 액자 너머 보지 않아도 될 모습까지 함께 들어오고 마는 걸.

    보이지 않는 곳에, 생각을 담은 액자 마음을 담은 액자도 있을까. 액자에 담긴 마음을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액자에 담긴 시간을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동그란 소녀 얼굴이 보여.

    왜 넌 자전거를 타지 않니?

    넌 왜 액자에 담겨 있지 않니, 라고 되물을 뻔 해. 난 잠시 그 고운 볼을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껴. 만약 화가가 될 수 있었다면, 아마 이 소녀는 내가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겠지.

    왜 넌 이 재밌게 생긴 자전거를 끌고만 다니냐구?

    소녀가 재촉하듯 다시 물어.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어깨만 으쓱, 하지. 소녀는 계속, 한 번 타보라며 버릇없는 때를 써 대지. 자전거 손잡이를 꼭 쥔 내 손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와.

    이러지 마.

    내 목소리가 너무 날카로워서 나도 좀 놀라. 내가 원래 이런 목소리를 갖고 있었던가, 식어버린 시간 따라 목젖도 식은 건가. 괜스레 당황해, 정말로 화 난 척 얼굴 찌푸리며 몸을 돌려. 자전거가 삐걱거리며 날 따라 돌아. 뒤에서 바작바작, 소녀도 날 따라 도는 소리가 들려. 소녀가 몸을 꺾어 비스듬히 날 바라봐.

    화났니?

    전혀 미안함 따윈 없는 표정이지. 난 어이없어 다시 어깨를 으쓱이지. 소녀는 낯익은 쑥스러운 웃음지어 보여. 나도 몰래 웃음이 따라 나오려는 걸 힘들게 참아보지. 소녀가 하늘을 올려보며 말해.

    날이 흐리네. 나 자전거 한 번 더 타 봐도 되니?

    과연, 우아하게 날갯짓하는 백조도 까마귀로 보일 침침한 날이야. 구름은 변비라도 걸린 듯 꽉 막힌 항문으로 물똥도 못 싸고 맴돌고만 있어. 하지만, 그게 자전걸 타는 것과 무슨 상관이란 말야.




뱀파이어의 시간- 일용할 양식 연재소설: 뱀파이어의 시간

    풋풋한 풀밭 위로 주홍색 개양귀비 넘쳐흐르는 완만한 언덕길, 그 너머로 어렴풋이 드러난 황토색 지붕의 학교 건물, 기울어진 지평선을 비뚜름하게 가린 너도밤나무의 짙푸른 행렬, 촉촉한 하늘에 온통 하얗게 드리운 면사포구름의 성긴 매듭을 간신히 비집고 녹아내리는 뿌연 햇무리, 멀리서 맴도는 연풍의 길 지치며 휘파람새보다도 더 빨리 내게 날아오는, 너.

    살짝 말려 올라간 갈색 머릿결이 마주치는 바람결에 얽히며, 너는 굵은 남서풍에 매달린 전동차처럼 하늘까지 미끄러져 오를 것 같았어. 그 뒤로 붉은 꽃이파리 푸른 나뭇잎사귀가 거칠게 끊어지며 맴돌고, 요란하게 체인 감기는 소리와 가볍게 울리는 먼 종소리 틈으로 너의 시원한 웃음이 들렸지.

    우리는 마을 어귀를 스치는 시냇가며 산자락을 함께 달리기 시작했지. 너는 너의 낡은 파실 하이 힐 자전거를, 나는 내 로버 세이프티 자전거를 타고. 그러다가 내 운전 솜씨가 더 좋아진 뒤엔 서로의 자전거를 바꿔 타기도 했지.

    그렇게 파실과 로버의 시간선이 엇갈리고, 너와 나의 시간선이 엇갈리고, 파실을 탄 너와 로버를 탄 나와 파실을 탄 나와 로버를 탄 네가 마주치며 꼬여 갔지.


    내가 너를 뒤쫓으며 소리 지르고, 네가 나를 뒤쫓으며 소리 지르고, 두 개의 자전거에 오른 소녀와 소년이 어느새 하나의 자전거에 오른 한 사람처럼 나란히, 폭신한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리곤 했지.

    우린 둘 다 지쳐빠졌지. 자전거를 뉘어둔 채 냇가에 몸 기울여 손 씻고 목 축이고, 함께 풀밭 위에 쓰러져버렸어. 늦봄의 둔한 바람이 구름을 서서히 풀어헤쳤고, 흰 빛은 하늘빛에 스며들어 터키옥처럼 반짝이기 시작했어. 나는 너의 짙은 갈색머리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장난스럽게 너의 손가락을 간질였지. 너는 내 손등을 꾹 쥐었어. 아직 젖살도 채 가시지 않은 두 개의 손이 냇물기를 머금고 서로 단단히 맺혀 있었지. 나는 살짝 곁눈질로 널 훔쳐봤어. 넌, 날 훔쳐보던 눈길을 빠르게 거둬 하늘 높이 던져버렸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고운 볼에 젖은 물방울이 하늘과 땅을 담은 비취로 일렁이고 있었어. 난 말없이 보석 같은 널 바라보았어. 보석의 맑은 단면에 비친 날 바라보았어. 무표정하던 넌 쑥스럽게 입 꼬리를 올렸어.

    갑자기 네가 물었어.

    "너 마가렛 르롱이란 사람 알아?"

    "마가렛 르롱…… 그게 누군데?"

    달콤한 침묵에서 미처 깨지 못한 나는, 귀에 선 이름을 무심히 뇌며 되물었어.

    "마가렛 르롱이란 여자가, 얼마 전에 미국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자전거로 혼자 여행했대!"

    "시카고랑 샌프란시스코가 많이 멀어?"

    "그럼! 아마 여기서 중국까지 거리 정도나 될 걸?"

    "와, 대단하네. 그 여자도 너처럼 블루머를 입었대?"

    "그럼! 블루머를 입고, 가방에는 화장품 상자와 권총 한 자루가 들어있었다지? 멋지지 않아? 그녀는 여자의 아름다움과 남자의 힘을 동시에 갖춘 완벽한 인간이라구!"

    화장품과 권총이라…… 독한 향수에 화약을 섞으면 대체 어떤 지옥 같은 냄새가 날까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이런, 난 지금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좋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조용히 듣고 있었어.

    "나도 언젠가 최신형 로버를 사서, 여기서 중국까지 횡단하고 말거야!"

    "멋지다. 하지만, 그 정도 거리는 이미 그 여자가 횡단했다며. 넌 더 멀리 가야 하는 거 아냐?"

    "듣고 보니 그러네. 음…… 인도? 인도가 중국보다 먼가?"

    "음, 아마 그럴 걸."

    "그럼 인도까지 횡단하는 게 내 목표다!"

    "언제?"

    "글쎄…… 한 열일곱 살 때?"

    "그럼…… 그때가 되면 이 마을을 떠난단 얘기네?"

    갑자기 내 얼굴에 서린 근심을 읽은 네가 웃으며 말했어.

    "바보야, 너도 같이 가면 되지."

    "내가? 난 너보다 자전거를 못타는데."

    "그러니까 더 열심히 연습하면 되잖아."

    "하지만 난…… 화가가 되고 싶은걸."

    "화가? 르누아르 같은 화가?"

    "아니…… 시슬레 같은 화가."

    "피. 그게 뭐야."

    찌푸려지는 네 얼굴에서 마지막 보석 한 알이 날아갔어.

    "그래서, 나랑 같이 가기 싫다구?"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멋진 해결책을 내놨어.

    "이렇게 하면 어떨까? 넌 화장품과 권총을, 난 화구를 짊어지고, 함께 자전거 여행을 떠나는 거야. 그건 너에겐 완벽한 여성이 되기 위한 모험일 거구, 나에게는 먼 곳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넣는 스케치 여행이 되는 거지. 어때?"

    "그림이나 그리면서 쭐레쭐레 다녀서 언제 인도까지 간다는 거야?"

    듣고 보니 그렇긴 했어. 하지만 그렇게까지 신경질적으로 말할 건 없잖아. 난 시무룩해져 잠시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았어.

    갑작스런 바람이 구름을 활짝 열어젖히고, 햇살이 날카롭게 쏟아져 내렸어. 난 눈부심에 몸을 뒤척였지. 길쭉하게 날이 선 풀잎 한 가닥이 팔뚝을 쓰윽 베고 지났어. 난 놀라 벌떡 일어났어.

    넌 엄살 피우며 팔 문지르는 내 모습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봤어. 난 살짝 서러워졌어. 넌 달래듯 날 토닥이고, 냇물을 떠다 옅게 엉긴 핏자국을 씻어줬지. 하지만 피는 멎지 않고 계속 조금씩 솟아올랐지. 너는 내 얼굴과 팔을 번갈아 바라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어.

    그리고 내 팔을 들어, 상처자리를 핥기 시작했어.

    왠지 조금 부끄러웠지만 가만히 있었어. 솔직히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어. 너는 배고픈 강아지 같은 두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쉬지 않고 혀를 놀려 팔을 간질였어. 핏기가 오른 붉은 입술이 함께 부지런히 꼬물거리고 있었지. 사각사각 소리 내며 끈적끈적하게 젖어드는 팔 때문이었는지, 나는 너를 와락 껴안고 싶어졌어.

    잠시 후, 자전거에서 막 내렸을 때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로 내 팔을 내려놓는 너의 입가에는, 침이 살짝 묻어 있었지. 난 조금 가빠진 숨을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입에서 나오는 데로 말도 안 되는 걸 물었어.

    "내 피 맛이 어때?"

    너는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어.

    "맛있어."

    그게 뭐야, 나는 어이없어 낄낄 웃어버렸어. 하지만 넌 웃지 않았어. 오히려 더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어.

    "진짜, 너무 맛있어. 다시 먹고 싶을 정도로."

    그러면서 내 손을 꼭 잡았어. 우리는 다시 풀밭에 누워, 실구름이 바람 따라 엉켜가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았지.





뱀파이어의 시간- 헌화獻花 연재소설: 뱀파이어의 시간

   도심의 밤 공원은 저만의 시간을 거칠게 엮어 무거운 그림자처럼 내두르지. 앙상한 나무 몇 그루 힘겹게 서로 깍지 껴 작은 숲을 이루지. 알록달록한 원색의 칼날이 규칙적인 굉음 뱉으며 땅에게서 하늘을 베어내고, 깎여나가는 숲은 초라한 어둠으로 서서히 수축하지.

   어둠은 어슴푸레한 저만의 빛을 머금고 있지. 곧게 뻗은 몇 가닥의 절개선 떠오르면, 어둠은 푸르스름한 회색 이빨로 침묵을 뒤흔들며 으르렁대는 거야. 하지만 닳아빠진 송곳니 귀퉁이가 너무 선명해, 무엇도 물어뜯지 못하고 겁주지도 못하지. 어둠은 겁에 질려 살 길 찾는 짐승처럼, 제가 가진 온 힘을 쥐어짜 신음하는 것뿐이지.

   나는 천천히…… 닿지 않을 어둠 향해 손 뻗지. 시린 손가락은 마디마디 잠겨들어, 어둠이 머금은 또 한    벌의 어금니처럼 박혀들지. 나는 이런 식으로 어둠의 일부가 되어 어둠을 느끼지.

   어둠의 허기를 느끼지.

   나의 시간이 어둠의 시간이 되어갈 수 있는 것은, 어둠이 모든 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야. 시간의 입자는 마치 색깔인 것 같아, 혼색混色이 흑색黑色이 되듯 모든 시간을 담으며 완전한 어둠이 되지. 그리고 나는 백척간두百尺竿頭 위에 선 광대처럼 위태롭게 어둠을 사랑하는 거지.

   네가 잠겨든 어둠을, 사랑하는 거지.

   어둠의 무뚝뚝한 이빨이 서로 부딪치며 흔들리더니, 꺾이고 휘어져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가. 뭉뚱그려진 이빨은 하늘에서 문득문득 떨어져 내리는 별빛 조각에 부딪쳐 더 단단히 말려들어. 푸르스름한 회색 뭉치, 푸릇푸릇한 회색 뭉치, 푸르뎅뎅한 회색 뭉치, 파르르한 회색 뭉치, 푸르께한 회색 뭉치로 흩어져가던 것들이, 천천히 서로의 끄트머리를 맞물면서 은은한 향과 함께 둥글게 퍼져나가.


   빛에게 상처 입은 어둠, 그 속에서만 필 수 있는 서러운 꽃 한 송이가, 내 가슴에 무겁게 뿌리내려 가고 있어.

   그렇게, 멈춰버린 나의 시간 위에 투사되는 세상의 싸늘함이 차곡차곡, 버거운 무게를 나에게만 남기곤, 모든 걸 잊었다는 듯 다시 흘러가는 거지.




뱀파이어의 시간- 날 수 없어, 너 없인(2) 연재소설: 뱀파이어의 시간

    빌어먹을.

    드러누운 자전거 옆에 쭈그린 채 무릎 비비는 날 신나게 비웃으며, 녀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지. 빌어먹을 자식들. 양 무릎은 벗겨져 피가 흐르고, 손바닥도 쓰라리고, 왼 발목은 자전거에 눌려 심하게 삔 것 같았어. 아프기도 아프지만, 분하고 창피해서, 눈물이 울컥 쏟아지려 했지.

    "울지 마라, 아가야."

    빌어먹을, 귀에 익은 목소리로 비꼬는 이 말투는 분명, 계집 주제에 사내처럼 만날 블루머 바지만 입고 다니는 윗집 왈가닥이 틀림없었어. 남자애 중 누군가가 여자애를 괴롭혔다고 하면 앞장서서 복수해주곤 하던 깡패 같은 계집, 힘으로는 사내 여럿 몫을 너끈히 하고 남을 정 떨어지는 계집.

    "울긴 누가 우냐. 모래가 눈에 들어가 쓰라리니까 그러지."

    계집은 건방지게도 피식, 웃어버리더군. 나는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어.

    "눈물이 아니라 땀이다, 땀! 그러니까 저리 꺼져!"

    계집은 대꾸도 없이 호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 한 장을 꺼냈어. 어울리지 않게 아기자기한 분홍 손수건이었어. 계집은 다가와 내 볼을 닦으며 말했어.

    "아직 꼬맹이구나."

    나는 짜증이 치밀어 손수건을 든 계집의 손목을 거칠게 탁, 쳐버렸어. 그리곤 내심 움찔했어. 이 계집 손이 정말 매웠거든. 전에 한 번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때리는데 거짓말 안 치고 정말 어른한테 맞은 줄 알았지. 하지만 계집은 어이없다는 듯 다시 픽 웃고,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어.

    "근사한데, 너한테 안 어울리게."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지. 비참하게 서너 번 구르는 꼴을 이 계집도 멀리서 지켜봤을 테니. 계집은 자전거 안장을 찰싹찰싹 때려 먼지를 털어내더니, 왼발을 왼쪽 페달에 얹고 오른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어. 그리고 어리둥절해진 내가 뭐라 소리도 못 내는 사이, 빠르게 미끄러지는 자전거에 날렵하게 올라타 버렸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어, 난 훌쩍이며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어. 그러다가 상황을 파악하고 겁에 질려 뛰기 시작하며 소리쳤지.

    "자전거 도둑이다! 자전거 도둑!"

    "누가 도둑이야?"

    어느새 계집은 골목을 짧게 한 바퀴 돌아 내 뒤에 서 있었어. 살짝 달아오른 두 볼과 가볍게 들썩이는 어깨가…… 좀 예뻐 보였어. 이래저래 재수 없는 날이었지.

    "뭘 그렇게 봐?"

    나는 괜히 움찔해서 짐짓 거칠게 대꾸했지.

    "보긴 뭘 봤다 그래? 이 도둑아!"

    계집은, 사람 성질 돋우는 그 콧소리로, 다시 한 번 픽 웃었어. 그런데 그것도 좀…… 예뻐 보였어. 아무래도 자전거에서 너무 심하게 굴렀나봐.

    "너, 내가 자전거 타는 법 가르쳐줄까?"

    계집은, 천천히 자전거를 뒤로 빼며 물었어. 기분 탓인지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어. 그러더니 이 계집이 이번엔 픽, 이 아니라 배시시, 웃는 거 있지. 그런데 그것도 좀…… 아니 제법…… 꽤 예뻐 보였어.




뱀파이어의 시간- 날 수 없어, 너 없인 연재소설: 뱀파이어의 시간

    "돌아오는 토요일에 반드시 가르쳐주마."

    아버지는 떼쓰는 날 달래며 약속하시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셨어. 이제 겨우 월요일인데, 대체 이 멋진 자전거를 놔두고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참으라는 거야? 나는 발을 미친 듯이 구르며 나동그라졌어. 울부짖는 날 어머니에게 묶어 놓듯 맡기고, 아버지는 난처한 미소 지으며 떠나버리셨어.

    나는 아침 먹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봤지. 어머니가 온갖 말로 어르며 내 정신을 다른 쪽으로 끌어보려 하셨지만, 소용없었어. 동생이 식탁에서 선물 받은 인형을 갖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며 놀아, 나는 더욱 짜증스러워졌지. 마지막 베이컨을 덩어리째 삼키고 반 컵 정도 남은 우유를 한 모금에 쏟아 부으며 결심했지. 무작정 끌고 나가보자고.


    날씨는 아주 적당히 맑았지. 오른쪽에 새 자전거를 끼고 가슴을 떡 편 채로 골목길을 나서자, 동네 꼬마 녀석들이 알아보고 하나둘 달려들기 시작했어.

    "웃기게 생긴 자전거다."

    이런 촌놈.

    "바보야, 저게 바로 최신식 로버라는 거야."

    이 녀석이 뭘 좀 아네.

    "앞바퀴가 뭐 저렇게 작아?"

    "그래도 저거 타면 진짜 빨리 달릴 수 있대."

    "네가 어떻게 알아?"

    "우리 큰아버지도 얼마 전에 저걸 사셨으니까 알지 멍청아. 저걸 타면 찰스 테롱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걸."

    "네가 더 멍청이다! 찰스 테롱도 로버를 타는데 어떻게 찰스 테롱보다 빨리 달릴 수 있냐?"

    한 놈씩 번갈아 자전거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뽐내며 신기한 표정으로 날 둘러싸기 시작했어. 나는 어깨가 으쓱해져선, 함부로 자전거를 만져보려는 잡놈들의 손바닥을 쳐내기 바빴지.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던진 질문에 몸이 바짝 굳었지.

    "그런데 너, 이거 탈 줄 아냐?"

    내가 응? 응? 하며 딴청 피우는 사이 누군가 질문을 가로챘어.

    "당연히 알겠지, 자전거 주인이 제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게 말이 돼?"

    "에이, 못 탈 거 같은데? 이 녀석 지난주까지도 계집애처럼 가랑이 모은 채로 세 발 자전거 끌고 다녔잖아."

    "하긴 그러네, 탈 줄 알면 여기까지 끌고 왔겠어? 타고 왔겠지."

    "뭐야, 타지도 못하는 자전거를 왜 끌고 다녀?"

    듣자 하니 녀석들의 조롱이 점점 심해져, 나도 모르게 책임지지 못할 말을 내뱉고 말았지.

    "탈 줄 알아, 당연히!"

    "어디 그럼, 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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